뿌하인드
작년 겨울 계단뿌셔클럽에 한 통의 짧은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짧고 감동적인 이 메일을 읽고 보내신 분을 꼭 만나 뵙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발신자 신 선생님을 최근 만났습니다. 오늘은 신 선생님께서 들려주신 희소한 이야기를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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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조금 따뜻해지면 만날까요? 제가 사무실로 갈게요.”
바로 만나 뵙고 싶었지만 따뜻한 날 만나자는 신 선생님의 말씀에 조금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봄이 찾아와 다시 연락을 드렸습니다. 이제는 날씨가 좋아져 괜찮을 것 같다며 흔쾌히 시간을 내주셨습니다. 화창하고 따뜻한 어느 점심 무렵 멋쟁이 지팡이를 짚은 신 선생님이 찾아와 주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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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를 나누고 마주 앉았습니다. 초면이라 약간 어색한 분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신 선생님이 가방에서 책을 한 권 꺼내셨습니다. “관심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전에 썼던 책인데…”하시며 조금 쑥스러운 표정으로 건내주셨습니다. 저는 책 표지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복지국가 스웨덴: 국민의 집으로 가는 길>, 제가 대학생 때 인상 깊게 읽고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 책이었거든요. 감명 깊게 읽은 책의 저자를 뜻밖의 자리에서 만나게 되어 무척 신기하고 반가웠습니다.
선생님은 젊은 시절에 스웨덴에서 유학을 하셨고, 학위를 받으시곤 스웨덴 정부에서 20년 간 일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오셔서도 정부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는 일들을 하셨습니다. 한국전쟁 이전인 40년대에 태어나 70년대에 스웨덴으로 유학을 하고, 한참을 일하시다가, 90년대에 한국에 돌아와 복지 정책을 기획하는 삶이라니, 사실 좀 신기했고 정말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한 공익재단의 이사장을 맡고 계시다고 합니다.
신문에 실린 계단뿌셔클럽의 이야기를 우연히 읽으시곤 관심이 생기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뿌클레터를 받아 보시면서 참 흥미롭고 재미있으셨대요.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서 문제를 해결해나간다는 점, ‘장애인’이 아니라 ‘이동약자’를 주인공으로 삼는다는 점이 특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정체성으로 삼는 요점을 어떻게 콕콕 짚어 칭찬하실 수 있는 걸까 신기했는데, 신 선생님께서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오신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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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돌아와 한창 활동하시던 시기의 신 선생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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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장애인 정책의 전문가이기도 하지만 당사자이시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아 걸음이 약간 불편합니다. 꽃무늬의 멋진 지팡이를 사용하십니다. 사춘기 시절에는 고민도 많고 속상할 때도 많으셨다고 합니다. 지금보다 차별적 시선과 편견이 더 많았던 시대였으니 고충이 컸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 73년 유학을 위해 스웨덴 사회에 갔는데, 놀라운 경험을 하시게 됩니다. 문득 생각해보니 자신에게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고 생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장애인이라서 할 수 없는 일이 스웨덴에는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도시 전체에 유니버설 디자인이 적용되어 있어 갈 수 없는 곳이 드물었습니다. 공부하는 데에도 지장이 없었습니다. 학위를 받고 취업을 하는 데에도 ‘장애’는 별다른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장애로 인한 불편, 차별을 만날 일이 거의 없다 보니 자신에게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스웨덴도 완벽한 나라는 아니지만, 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시스템’에서는 배울 점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보니 차이가 컸습니다. 제도, 환경뿐 아니라 ‘인식’도 달랐습니다. 1990년대 한 토론회에서 “장애인을 위한 정책은 노인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한 노인단체 대표가 버럭 호통을 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장애인과 노인을 같은 선상에 두는 것이 기분 나쁘다’는 겁니다. 한국에 돌아온 선생님의 삶은 장애에 대한 차별적 인식과 환경을 바꾸는 일로 채워졌습니다. <복지국가 스웨덴>과 같은 책을 써 대안적 생각을 널리 알리셨고, 시민단체 활동가로 일하셨고, 대통령의 정책 비서관으로, 장애인 고용을 담당하는 공공기관 이사장으로 장애를 의식할 수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애쓰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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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클레터를 읽고 ‘윌리’와 ‘버기’의 이름을 기억해주신 신 선생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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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먼저 문제해결자의 삶을 살아오신 신 선생님 이야기를 들으며 겸허해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제도, 환경, 문화 모두 누군가 애써서 만들어낸 저작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계단뿌셔클럽이 “이동약자에는 휠체어 사용자뿐 아니라 고령자, 어린이, 유아차 사용자가 포함된다”고 말할 때 버럭 화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까닭은 우리가 논리적으로 설명해서가 아니라 선생(先生)님들이 차별적 인식을 바꾸기 위해 글 쓰고, 말하고, 싸우고, 일하면서 문제를 해결해왔기 때문이라는 점을 깨닫게 됐습니다.
신 선생님은 은퇴를 앞두고 계십니다. 은퇴 후에는 이웃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고 싶었는데, 계단뿌셔클럽이 제격이란 생각을 하셨대요. 또래의 이동약자들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모임을 만들면 의미도 크고, 젊은이들과 협동하면 재미도 있을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반갑고 감사한 말씀이었습니다. 늘 '고령자도 이동약자의 한 유형'이라고 말해왔지만, 시니어 선생님들도 그렇게 생각하실지 궁금했거든요. 세대를 초월해 친구가 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장면이 머지 않아 현실이 될 것 같습니다.
세상에 있는 가치 있는 것들 중에서 그냥 만들어진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 책임감을 갖고 애쓰고 노력해 베푼 스승(先生)의 은혜입니다. 신 선생님과 같은 좋은 어른들이 우리의 선생(先生)님인 것처럼 다가오는 세대에게는 우리가 선생님입니다. 스승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만큼 선생의 책무를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 언젠가 계단을 뿌시는 모험이 결실을 맺어 우리 또한 선생의 책무를 다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데, 50년 뒤에 태어난 친구들은 우리의 모험이 ‘이동약자와 그 친구들의 막힘없는 이동’에 보탬이 됐다는 걸 모를 수도 있겠네요! 그건 좀 서운할 것 같지 않으세요? 신 선생님, 혹시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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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봄시즌 게스트 모집 마감임박!
많은 분의 관심과 참여 덕분에 대부분의 정복활동이 인원 초과로 게스트 모집이 마감됐습니다. 이제 3개 일정만 남았습니다. 5월 19일, 6월 1일, 6월 2일 정복활동에 게스트로 오실 수 있어요. 이번 시즌 정복활동 참여를 고민하셨다면, 남은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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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뿌클레터는 어땠나요?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맘껏 남겨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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